167년 역사의 글로벌 금융 거인
크레디트스위스(Credit Suisse)는 1856년 설립되어 스위스를 대표하는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성장했습니다. 한때 자산 규모 1조 달러를 넘어섰고, 세계 30대 시스템적 중요 은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프라이빗뱅킹, 자산관리, 투자은행 부문에서 강점을 보이며 UBS와 함께 스위스 금융업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크레디트스위스는 일련의 스캔들과 경영 실패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2021년 두 가지 사건이 결정타를 가했습니다. 3월 아케고스캐피탈 파산으로 55억 달러 손실을 입었고, 4월 그린실캐피탈 사태로 100억 달러 규모의 공급망 금융 펀드가 붕괴하며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리스크 관리 실패가 명백히 드러났고, CEO가 사임했습니다. 2022년 연간 손실은 73억 스위스프랑에 달했고, 주가는 80% 이상 폭락했습니다. 한때 80스위스프랑이던 주가는 2022년 말 3프랑대까지 떨어졌습니다.
2023년 3월: 신뢰의 최종 붕괴
2023년 3월 14일 화요일, 크레디트스위스는 2021-2022년 재무보고에 중대한 취약점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회계 부정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최대 주주인 사우디 내셔널뱅크 회장이 "크레디트스위스에 추가 투자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은행에 대한 신뢰의 결정타였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 주가는 하루 만에 24% 폭락했고,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은 급등했습니다.
SVB 파산 사태 직후라는 타이밍도 최악이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은행 섹터 전반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상태였습니다. 3월 15일 수요일, 크레디트스위스는 스위스 중앙은행으로부터 최대 500억 스위스프랑의 유동성 지원을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은행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확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금과 자산 이탈이 가속화되었고, 하루 100억 스위스프랑 이상이 빠져나갔습니다. 유럽 은행들의 주가도 동반 하락하며 전염 우려가 확산되었습니다.
주말의 긴급 협상: 스위스의 선택
3월 17-19일 주말, 스위스 정부와 금융당국은 긴급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월요일 시장이 열리기 전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크레디트스위스는 파산할 것이고, 이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치명적 충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50개국 이상에서 영업하며 5만 명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파산하면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재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UBS에 크레디트스위스를 인수하도록 압박했습니다.
UBS는 처음에는 거부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의 부실 자산과 법적 리스크를 떠안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정부가 90억 스위스프랑의 손실을 보증하고, 1,000억 스위스프랑의 유동성을 지원하며, 법적 리스크도 상당 부분 면책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요일 밤 마감 시한이 다가오는 가운데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UBS는 크레디트스위스를 30억 스위스프랑에 인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는 크레디트스위스의 2022년 장부가치 440억 스위스프랑의 7%에 불과한 금액이었습니다.
AT1 채권 투자자들의 완전 손실
인수 조건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AT1 채권의 처리였습니다. AT1(Additional Tier 1) 채권은 은행의 자본 건전성을 보강하기 위해 발행하는 후순위 채권으로, 위기 시 손실을 흡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채권은 주식보다 우선순위가 높아 먼저 보호받지만, 스위스 당국은 160억 스위스프랑 규모의 AT1 채권을 완전히 무가치화했습니다. 동시에 주주들에게는 30억 스위스프랑이 지급되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청산 순서를 뒤집은 것이었습니다. AT1 채권 투자자들은 격분했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전 세계 AT1 채권 시장이 혼란에 빠졌고, 다른 유럽 은행들의 AT1 채권 가격도 급락했습니다. 투자자들은 AT1 채권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상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이 조치는 향후 은행들이 AT1 채권을 발행하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은행 인수합병
3월 19일 일요일 밤 11시, 스위스 정부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인수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월요일 아시아 시장이 열리기 1시간 전이었습니다. 합병 후 UBS는 자산 규모 1조 6천억 달러가 넘는 유럽 최대 은행이 되었습니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의 은행 인수합병이었습니다. 스위스의 두 글로벌 은행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스위스 금융업은 UBS 중심의 독과점 구조가 되었습니다.
시장은 안도했습니다. 월요일 유럽 증시는 상승 출발했고, 은행주도 반등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 파산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문제가 남았습니다. UBS는 크레디트스위스의 5만 명 직원 중 상당수를 해고해야 했고, 중복되는 지점과 사업부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두 은행의 IT 시스템과 문화를 통합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였습니다. 통합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경우 오히려 더 큰 리스크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Too Big To Fail의 재등장
크레디트스위스 인수 후 UBS는 스위스 GDP의 2배가 넘는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각국은 대형 은행들을 쪼개고 규제를 강화해 시스템 리스크를 줄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더 큰 은행을 만드는 것이 해결책이 되었습니다. UBS가 문제에 직면하면 스위스 정부는 구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스위스가 너무 큰 부담을 떠안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작은 나라가 글로벌 대형 은행을 감당하기에는 재정적 여력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2008년 자국 은행들이 GDP의 10배 규모로 부풀려지면서 국가 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한 바 있습니다. 스위스도 유사한 리스크에 노출되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EU와 미국 규제당국도 UBS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주는 교훈
크레디트스위스 사태는 여러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습니다. 첫째, 명성과 역사만으로는 은행을 지킬 수 없습니다. 167년 전통의 글로벌 은행도 신뢰를 잃으면 며칠 만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둘째, 리스크 관리와 지배구조의 중요성이 재확인되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아케고스와 그린실 사태로 이미 치명상을 입었고, 이는 복구 불가능한 신뢰 손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 규제 완화가 위기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스위스는 2000년대 금융업 육성을 위해 규제를 완화했고, 이는 은행들의 무리한 확장을 허용했습니다.
넷째, AT1 채권 같은 복잡한 금융상품의 리스크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투자자들이 AT1 채권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고수익 채권으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주식에 가까운 리스크를 안고 있었습니다. 다섯째,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상호연결성 때문에 한 은행의 문제가 전 세계로 순식간에 전염될 수 있습니다. SVB와 크레디트스위스는 서로 다른 대륙,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가졌지만, 일주일 사이에 연쇄적으로 무너졌습니다. 2023년 3월의 은행 위기는 금융 안정성이 여전히 깨지기 쉬운 것이며, 끊임없는 경계와 감독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돈 되는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ESG 투자의 성장과 그린워싱 논란 (1) | 2025.10.30 |
|---|---|
| 밈 주식과 레딧 혁명: 게임스탑 사태의 의미 (0) | 2025.10.29 |
|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 2023년 뱅크런의 재현 (0) | 2025.10.29 |
| 긴축과 침체 사이: 연준의 딜레마 (0) | 2025.10.28 |
|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 탈출과 엔화 약세 위기 (0) | 2025.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