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디플레이션과 마이너스 금리
일본은 1990년대 자산 버블 붕괴 이후 30년 넘게 디플레이션과 싸워왔습니다. 일본은행은 1999년 제로금리 정책을 도입했고, 2016년 1월에는 세계 주요 경제국 중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실시했습니다. 당좌예금 금리를 -0.1%로 설정해 은행들이 돈을 쌓아두지 말고 대출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동시에 장기금리 목표를 0% 수준으로 묶는 수익률곡선제어(YCC)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는 2013년 취임 후 "2년 내 2% 인플레이션 달성"을 목표로 대규모 양적완화를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행의 자산은 GDP의 130%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팽창했습니다. 일본 국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중앙은행이 보유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되었습니다. 마이너스 금리는 은행 수익성을 악화시켰고, 장기 저금리는 연금과 보험사의 운용 수익을 압박했습니다.
2022년: 엔화의 급격한 약세
2022년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급등하며 미국과 유럽이 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가운데, 일본만 홀로 완화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미일 금리 격차가 급속히 확대되었고, 엔화는 급락하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초 1달러당 115엔이던 환율은 10월 151엔까지 치솟았습니다. 이는 1990년 이후 32년 만에 최저 수준이었습니다. 엔화 가치는 불과 10개월 만에 30% 이상 하락한 것입니다.
엔화 약세는 수출 기업에는 호재였지만, 전반적으로는 국민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원유와 곡물 같은 수입품 가격이 급등하며 일본의 물가가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2022년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7%로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실질임금은 마이너스로 전환되었고, 가계의 구매력이 감소했습니다. 30년간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일본이 갑자기 인플레이션 문제에 직면한 것입니다.
일본은행의 외환시장 개입
2022년 9월 22일,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24년 만에 처음으로 엔화 방어를 위한 외환시장 개입을 단행했습니다. 달러를 매도하고 엔화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약 200억 달러 규모의 개입을 실시했습니다. 10월에는 추가로 400억 달러를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일본은행이 완화 정책을 유지하는 한 엔화 약세 압력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장은 일본의 딜레마를 간파했습니다. 금리를 올리면 막대한 국가부채의 이자 부담이 급증하고, GDP 대비 260%에 달하는 정부 부채의 지속가능성이 의문시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30년간의 저금리에 익숙해진 경제가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을 견딜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습니다. 하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면 엔화는 계속 떨어지고 수입 인플레이션은 악화될 것이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은행은 신중한 정책 수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익률곡선제어의 점진적 완화
2022년 12월 20일, 일본은행은 시장을 놀라게 하는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 상한을 기존 0.25%에서 0.5%로 상향 조정한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의 금리 인상이었고, 7년간 유지해온 초완화 정책의 수정 신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구로다 총재는 "시장 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라며 통화정책 변경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시장은 정책 전환의 시작으로 해석했습니다.
2023년 4월 우에다 가즈오가 새로운 총재로 취임했습니다. 우에다 총재는 전임자보다 신중한 접근을 취하면서도 정책 정상화의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7월 일본은행은 YCC를 더욱 유연하게 운용하겠다고 밝히며 10년 국채 금리가 0.5%를 넘어서도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실질적으로 YCC의 엄격한 틀을 허물기 시작한 것입니다. 10월에는 수익률 상한을 1%로 더욱 확대하며 정책 정상화를 가속화했습니다.
2024년 3월: 17년 만의 금리 인상
2024년 3월 19일, 일본은행은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폐지하고 정책금리를 0-0.1% 범위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는 2007년 이후 17년 만의 금리 인상이었습니다. 동시에 수익률곡선제어를 완전히 폐지하고, 국채 매입 규모도 점진적으로 축소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은 마침내 30년 디플레이션과 초완화 정책의 시대를 마감하고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에다 총재는 "임금과 물가가 선순환하는 구조가 확인되었다"며 금리 인상의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2024년 춘투(春闘, 임금 협상)에서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임금 인상이 합의되었습니다. 대기업들은 평균 5% 이상 임금을 올리기로 했고, 중소기업도 3-4% 인상에 동참했습니다. 물가 상승이 일시적 수입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내수 중심의 지속 가능한 인플레이션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금리 인상 이후의 변화
마이너스 금리 탈출 이후 일본 경제와 금융시장에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은행들의 수익성이 개선되기 시작했고, 예금자들은 오랜만에 이자 수입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채 시장은 중앙은행의 압도적 지배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시장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상승하며 부동산 시장에는 냉각 압력이 작용했습니다.
엔화는 금리 인상 발표 직후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였지만,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여전히 크기 때문에 극적인 반등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024년 하반기에도 엔화는 1달러당 140-150엔 수준에서 변동했습니다. 일본은행은 추가 금리 인상에 대해 "데이터 의존적으로 접근하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너무 빠른 정상화는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실험이 주는 교훈
일본의 30년 초완화 실험과 최근의 정책 정상화는 여러 교훈을 남깁니다. 첫째, 마이너스 금리와 극단적 양적완화는 단기적으로 경제를 지탱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 기능을 왜곡하고 부작용을 낳습니다. 둘째, 일단 초완화 정책에 의존하게 되면 빠져나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일본은 탈출 타이밍을 찾는 데 17년이 걸렸습니다.
셋째, 지속 가능한 인플레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통화정책만으로는 부족하고 구조 개혁과 임금 상승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일본이 마침내 디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인플레이션이라는 외부 충격과 노동시장 개선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넷째, 정책 정상화는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본은행의 단계적 접근은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정상화를 이루는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험은 다른 국가들이 초완화 정책의 출구 전략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입니다.
'돈 되는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 2023년 뱅크런의 재현 (0) | 2025.10.29 |
|---|---|
| 긴축과 침체 사이: 연준의 딜레마 (0) | 2025.10.28 |
| 제로금리 시대의 종말: 2022-2023년 급격한 금리 인상 (0) | 2025.10.28 |
|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 급등: 일시적 vs 구조적 논쟁 (0) | 2025.10.28 |
| 2020-2021년 재난지원금의 경제학: 헬리콥터 머니의 실제 효과 (1) | 2025.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