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투자의 부상
ESG는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로,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2010년대 후반부터 ESG는 투자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되었습니다. 2020년 전 세계 ESG 자산 규모는 35조 달러를 넘어섰고, 2025년에는 50조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특히 밀레니얼과 Z세대 투자자들이 수익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며 ESG 투자를 선호했습니다.
ESG 투자 열풍의 배경에는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확산이 있었습니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 이후 각국 정부가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투자자들도 기후 리스크를 재무 리스크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2020년 연례 서한에서 "기후 위기는 투자 리스크의 최전선에 있다"며 ESG를 투자 의사결정의 핵심으로 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의 이러한 입장 변화는 ESG를 주류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ESG 펀드의 폭발적 증가
2019-2021년 ESG 펀드로의 자금 유입은 폭발적이었습니다. 2020년 전 세계적으로 ESG 펀드에 5,420억 달러가 유입되었고, 2021년에는 6,490억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미국에서만 2021년 ESG 펀드 수가 600개를 넘어섰고, 운용자산은 3,3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유럽은 더욱 적극적이어서 ESG 펀드가 전체 펀드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에서도 ESG 펀드가 2020년 2조 원에서 2021년 20조 원으로 10배 증가했습니다.
기업들도 ESG 경영을 앞다투어 선언했습니다. S&P 500 기업의 90% 이상이 ESG 보고서를 발행했고, 많은 기업들이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애플은 2030년까지 공급망 전체를 탄소중립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2050년까지 창업 이래 배출한 모든 탄소를 회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금융기관들은 화석연료 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재생에너지와 친환경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습니다. ESG는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새로운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 듯 보였습니다.
그린워싱의 만연
하지만 곧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기업과 펀드가 실질적인 변화 없이 ESG 라벨만 붙이는 그린워싱에 빠졌습니다. 2021년 독일 경찰이 DWS(도이체방크 자산운용) 사무실을 급습했습니다. ESG 투자 비중을 과장했다는 혐의였습니다. DWS는 운용자산의 절반 이상이 ESG 기준을 충족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적었습니다. CEO가 사임했고, 수십억 달러가 펀드에서 빠져나갔습니다.
2022년 BNY멜론의 ESG 펀드도 SEC로부터 15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ESG 기준으로 종목을 선정한다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종목에 ESG 평가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HSBC의 한 운용역은 ESG가 "헛소리(bullshit)"라고 발언해 논란이 되었고, 결국 해고되었습니다. 업계 내부에서도 ESG가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많은 ESG 펀드가 일반 펀드와 보유 종목이 거의 차이가 없으면서도 더 높은 수수료를 받았습니다.
ESG 평가의 신뢰성 문제
더 근본적인 문제는 ESG 평가의 일관성과 신뢰성 부족이었습니다. MSCI, S&P, 서스테이널리틱스 같은 여러 평가기관이 있지만, 같은 기업에 대해 전혀 다른 점수를 부여했습니다. MIT 연구에 따르면 주요 평가기관 간 ESG 점수의 상관관계는 0.5에 불과했습니다. 신용등급의 상관관계가 0.99인 것과 대조적입니다. 테슬라는 S&P의 ESG 지수에서 제외되었지만, MSCI에서는 높은 등급을 받았습니다.
평가 방법론의 투명성도 부족했습니다. 어떤 기준을 얼마나 비중으로 적용하는지 명확하지 않았고, 기업이 자체 보고한 데이터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독립적인 검증이 부족해 기업들이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공개할 유인이 있었습니다. 또한 E, S, G 세 영역의 가중치를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합의도 없었습니다. 탄소 배출이 많지만 좋은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과, 친환경적이지만 노동 문제가 있는 기업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ESG 기업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성과 논쟁: ESG가 수익률을 높이는가
ESG 투자가 더 나은 수익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논쟁도 치열했습니다. ESG 지지자들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기업이 더 좋은 성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후 리스크, 규제 변화, 평판 리스크를 잘 관리하는 기업이 결국 승자가 될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실제로 2019-2020년 많은 ESG 펀드가 시장 수익률을 상회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ESG 펀드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형 기술주를 많이 보유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2022년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며 화석연료 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했고, ESG 펀드는 이들 기업을 배제했기 때문에 손실을 입었습니다. S&P 500 ESG 지수는 일반 S&P 500 대비 2-3% 낮은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비판자들은 ESG가 투자 수익을 희생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학술 연구들도 엇갈린 결과를 보였습니다. 일부는 ESG가 리스크 조정 수익률을 개선한다고 했고, 다른 연구들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ESG 투자의 재무적 이점은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정치화된 ESG: 미국의 문화 전쟁
2022-2023년 미국에서 ESG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섰습니다. 공화당 주도 주들이 ESG를 "깨어있는(woke) 자본주의"라고 비난하며 반ESG 입법을 추진했습니다. 텍사스는 화석연료 산업을 차별하는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금지했고, 플로리다는 주 연기금의 ESG 투자를 금지했습니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우리는 사회 공학 실험이 아니라 수익률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블랙록은 보수 진영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텍사스를 비롯한 여러 주가 블랙록에서 수십억 달러를 인출했습니다. 래리 핑크 회장은 2023년 연례 서한에서 "ESG"라는 단어 사용을 줄이고 "에너지 전환"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민주당 진영에서는 오히려 블랙록이 기후 약속을 후퇴시켰다며 비판했습니다. ESG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공격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금융기관들은 ESG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지속가능성", "임팩트 투자" 같은 대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ESG의 미래: 진화인가 쇠퇴인가
2024-2025년 ESG는 전환점에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2024년부터 지속가능금융공시규정(SFDR)을 강화해 그린워싱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더 엄격한 보고 기준을 충족해야 하고, 허위 공시에는 무거운 제재가 가해집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글로벌 통일 ESG 공시 기준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제 강화로 ESG가 더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ESG 자금 유입은 크게 둔화되었습니다. 2022-2023년 ESG 펀드에서 순유출이 발생한 달도 있었습니다. 많은 자산운용사들이 ESG 펀드를 폐쇄하거나 일반 펀드와 통합했습니다. ESG는 과대 광고의 정점을 지나 현실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앞으로 ESG는 별도의 투자 카테고리가 아니라 모든 투자 분석에 통합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후 리스크, 노동 관행, 지배구조는 재무 분석의 일부가 되어야지, 독립적인 평가 체계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는 인식입니다. ESG의 미래는 덜 화려하지만 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방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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