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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는 정보

1929년 대공황은 왜 발생했고 어떻게 극복했을까

by 위닝스텝 2025. 11. 4.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은 20세기 최악의 경제 위기였습니다. 미국 실업률은 25%를 넘었고, 수천 개의 은행이 파산했으며, 전 세계가 불황의 늪에 빠졌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는 왜 발생했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대공황 발생의 배경

1920년대의 광란

1920년대 미국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 불릴 정도로 번영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급성장했습니다. 자동차, 라디오, 전기제품 같은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졌고,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낮아지면서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주식 시장도 활황이었습니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다우존스 지수는 5배 가까이 상승했습니다. 너도나도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마진 거래로 빚을 내서 주식을 샀습니다. 10%만 자기 돈으로 내고 나머지 90%는 빌려서 투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경제 구조의 불균형

하지만 번영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극심했습니다. 1929년 미국 전체 소득의 40% 이상을 상위 5%가 차지했습니다. 대다수 국민의 구매력은 제한적이었지만, 기업들은 대량생산을 계속했습니다.

농업 부문은 이미 불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식량 수요 증가로 농지를 확대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많은 농민들이 빚에 시달렸고, 농촌 경제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대공황 발생의 주요 원인:

• 주식 시장의 과열과 투기 광풍

• 소득 불평등과 구매력 부족

• 은행의 무분별한 대출

• 생산 과잉과 재고 누적

• 국제 무역의 불균형

• 금본위제의 경직성

1929년 주가 대폭락

검은 목요일, 10월 24일

1929년 9월부터 주가가 불안정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이 주가가 너무 높다고 경고했지만, 대부분은 무시했습니다. 10월 24일 목요일, 주식 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대량의 매도 주문이 쏟아졌습니다. 패닉 상태가 된 투자자들은 앞다투어 주식을 팔았습니다.

하루에 1,290만 주가 거래되었는데, 이는 당시 기록적인 수치였습니다. 주요 은행가들이 모여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주식을 매수했고, 일시적으로 시장이 진정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검은 화요일, 10월 29일

10월 29일 화요일, 주식 시장은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검은 화요일이라 불리는 이날, 1,600만 주가 거래되었고, 다우존스 지수는 하루에 12% 폭락했습니다. 많은 기업들의 주가가 반토막 났고, 일부는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마진으로 주식을 산 투자자들은 파산했습니다. 증권사들은 추가 증거금을 요구했지만, 투자자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억만장자들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일부는 투신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월스트리트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경제 대공황의 심화

은행 도산의 연쇄 반응

주가 폭락 이후 실물 경제로 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은행 도산이었습니다. 주식 시장에 투자했던 은행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사람들은 예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뱅크런(bank run) 현상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예금보험제도가 없었습니다. 은행이 파산하면 예금자들은 돈을 잃었습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약 9,000개의 은행이 파산했습니다. 사람들은 현금을 집에 숨겨두었고, 이는 통화 공급을 더욱 감소시켰습니다.

실업과 빈곤의 확산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고 직원을 해고했습니다. 1933년 미국 실업률은 25%에 달했습니다. 4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도 임금이 대폭 삭감되었습니다. 1929년과 1933년 사이 국민총생산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대공황의 진행 과정:

• 1929년: 주가 폭락, 공황 시작

• 1930년: 기업 도산 증가, 실업률 8%

• 1931년: 유럽으로 공황 확산, 금본위제 붕괴

• 1932년: 실업률 23%, 사회 불안 고조

• 1933년: 실업률 25%, 최악의 상황

거리에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집을 잃고 판잣집에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빈민촌을 당시 대통령 후버의 이름을 따서 후버빌(Hooverville)이라고 불렀습니다. 무료 급식소 앞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후버 대통령의 대응과 한계

자유방임주의의 고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했습니다. 그는 경제가 스스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고, "번영은 곧 돌아올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후버는 일부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공공사업을 확대하고, 재건금융공사를 설립하여 은행과 기업에 대출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너무 작았고, 직접적인 실업자 구제는 거부했습니다. 그는 "국민에게 직접 구호금을 주는 것은 자립심을 해친다"고 주장했습니다.

스무트 홀리 관세법의 실패

1930년 미국 의회는 스무트 홀리 관세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여 미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재앙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보복 관세를 부과했고, 국제 무역이 급감했습니다.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세계 무역 규모는 65% 감소했습니다. 대공황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도 심각한 불황에 빠졌습니다.

뉴딜 정책과 회복

1933년, 루스벨트의 취임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압도적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는 뉴딜(New Deal) 정책으로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약속했습니다.

취임 직후 루스벨트는 즉시 행동했습니다. 모든 은행을 4일간 폐쇄하고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건전한 은행만 영업을 재개하도록 했고, 예금보험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국민들의 신뢰가 회복되면서 은행 도산이 멈췄습니다.

뉴딜 정책의 주요 내용

루스벨트는 취임 후 100일간 15개의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100일 뉴딜입니다. 실업자 구제, 농업 지원, 산업 규제, 금융 개혁 등 경제의 모든 영역에 정부가 개입했습니다.

뉴딜 정책의 핵심 프로그램:

• CCC(민간자원보존대): 300만 젊은이에게 산림 조성 일자리 제공

• WPA(공공사업진흥청): 대규모 공공건설 사업으로 일자리 창출

• TVA(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 댐 건설과 전력 공급

• 사회보장법: 노령연금과 실업보험 제도 도입

• 와그너법: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보장

• 예금보험제도: 은행 예금 보호

공공사업을 통해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댐, 도로, 학교, 공원이 건설되었습니다. 실업자들은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았고, 이는 소비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경제에 선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공황 극복과 교훈

점진적 회복

뉴딜 정책으로 경제는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을 바닥으로 실업률은 점차 낮아졌습니다. 1937년까지 경제가 성장했지만, 1937년 루스벨트가 재정 지출을 줄이자 다시 경기가 후퇴했습니다. 이는 재정 정책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대공황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군수 생산이 경제를 완전 고용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1941년 미국이 참전하면서 실업률은 급격히 낮아졌고, 경제는 다시 활황을 맞았습니다.

경제학과 정책의 변화

대공황은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꿨습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하고,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불황기에는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려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가 주류가 되었습니다.

금융 규제도 강화되었습니다. 증권거래위원회가 설립되어 주식 시장을 감독했고, 은행과 증권사의 겸업이 금지되었습니다. 중앙은행의 역할도 강화되어 통화 정책을 통해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복지 국가의 탄생

뉴딜 정책은 미국을 복지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사회보장제도, 실업보험, 최저임금제 등이 도입되었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제도들은 오늘날까지 미국 사회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며

1929년 대공황은 자유방임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주식 시장의 투기, 소득 불평등,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이 결합되어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25%가 넘는 실업률과 수천 개 은행의 파산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위협했습니다.

대공황의 극복 과정은 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입증했습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적극적인 재정 정책과 사회 안전망 구축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켰습니다. 이는 현대 경제학과 정책의 토대가 되었으며,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많은 교훈을 제공했습니다. 대공황은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경제 위기였지만, 동시에 더 나은 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